삼국시대

백성의 삶

이 게임은 왕과 장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은 대부분 왕도 장수도 아니었습니다 — 밭을 갈고, 밥을 찌고, 베를 짜고, 태어날 때 정해진 신분 안에서 살았습니다.

각 항목은 그 근거를 가진 국립박물관·국가기관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우리 요약을 믿을 필요 없이, 유물과 원사료를 직접 보시면 됩니다.

소가 끄는 쟁기

소가 끄는 쟁기

농사가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의 직업이었습니다.

『삼국사기』는 502년(지증왕 3년) 봄, 신라가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을 갈게 했다고 적습니다. 우경은 사람의 힘으로 갈던 땅을 몇 배로 넓혔고, 철제 보습과 쇠스랑이 함께 퍼지면서 한 집이 감당할 수 있는 농지가 달라졌습니다. 저수지도 이 시기의 기술입니다 — 김제 벽골제는 『삼국사기』에 330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쌓은 나라가 백제인지 신라인지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국가가 기록할 만한 사건이 전쟁이 아니라 ‘소로 밭을 갈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엌과 시루

부엌과 시루

밥은 끓이는 것이 아니라 찌는 것이었습니다.

황해도 안악 3호분(357년)의 동쪽 곁방에는 부엌, 방앗간, 우물, 고깃간, 외양간, 마구간이 벽마다 그려져 있습니다. 무덤 주인의 초상보다 이 그림들이 더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 부뚜막 위에 시루가 올라가 있고, 갈고리에 고기가 걸려 있고, 여인들이 방아를 찧습니다. 쌀·조·기장·콩을 시루에 쪄서 먹었고, 콩을 띄워 장을 담그는 방식도 이 시기에 자리를 잡습니다.

고구려 귀족이 자기 무덤에 남기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자기 집 부엌이었습니다.
구들 — 바닥이 따뜻한 집

구들 — 바닥이 따뜻한 집

한국식 난방은 이 시대 북방에서 시작됩니다.

아궁이의 열기를 방바닥 밑 고래로 통과시켜 구들장을 덥히는 방식은 고구려 권역의 집터에서 확인됩니다. 초기 형태는 방 전체가 아니라 한쪽만 데우는 ‘쪽구들’이었습니다. 겨울이 길고 땔감이 귀한 곳에서 나온 해법이고, 이후 천오백 년 동안 한국 집의 기본 구조가 됩니다. 대부분의 백성은 초가지붕을 얹은 흙집에 살았고, 기와는 관청·사찰·귀족의 것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아파트의 바닥 난방은 이 구들의 직계 후손입니다.
저고리와 바지

저고리와 바지

말을 타는 사람들의 옷이었습니다.

무용총 벽화의 사람들은 저고리에 통 넓은 바지, 여자는 주름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점무늬가 촘촘히 찍힌 옷감이 그대로 보입니다 — 이 시대의 직물이 어떤 무늬였는지 우리가 아는 것은 대부분 무덤 벽 덕분입니다. 위아래를 나눠 입고 허리를 띠로 묶는 이 구조는 기마 생활에 맞춘 북방식이며, 신분에 따라 쓸 수 있는 색과 옷감이 법으로 갈렸습니다.

옷 색깔이 취향이 아니라 신분이던 시대입니다.
골품 — 태어나며 정해진 자리

골품 — 태어나며 정해진 자리

신라에서는 혈통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이었습니다.

골품제는 사람을 성골·진골과 그 아래 두품으로 나누고, 각 등급마다 오를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을 못박았습니다. 규제는 관직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 집의 크기, 수레의 장식, 그릇, 옷감까지 신분별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유능해도 6두품은 일정 관등 위로 갈 수 없었고, 그 벽에 막힌 사람들이 뒷날 신라 바깥에서 길을 찾습니다. 두품 아래 다수 평민과 노비의 삶은 기록이 훨씬 적게 남았습니다.

능력이 아니라 태생이 상한선이었고, 그 상한선은 법조문이었습니다.
쇠 — 가야가 팔던 것

쇠 — 가야가 팔던 것

가야는 철로 먹고산 나라였습니다.

낙동강 하구의 가야는 질 좋은 철산지를 끼고 있었고, 덩이쇠(철정)를 규격화된 형태로 만들어 내다 팔았습니다. 중국 사서는 이 지역의 철을 낙랑과 왜가 가져다 썼으며 시장에서 돈처럼 쓰였다고 전합니다. 김해에서 나온 판갑옷·투구·말갖춤과 함께, 이 나라가 무엇으로 돌아갔는지 유물이 그대로 보여줍니다.

쇠가 무기이면서 동시에 화폐였습니다.
믿음이 바뀌던 때

믿음이 바뀌던 때

세 나라가 백 년을 사이에 두고 차례로 불교를 받아들입니다.

고구려가 372년, 백제가 384년, 신라가 527년에 불교를 공인합니다. 신라가 가장 늦었고 가장 격렬했습니다 — 이차돈의 순교 이야기가 남은 것이 그 저항의 크기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불교가 들어왔다고 해서 이전의 믿음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늘과 산천에 지내는 제사, 무당, 조상 숭배는 그대로 이어졌고, 절과 마을 신앙이 오래 함께 갑니다.

새 종교가 옛 믿음을 지운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얹혔습니다.
놀이와 소리

놀이와 소리

씨름은 최소 천육백 년 된 놀이입니다.

각저총 벽화에는 두 사람이 샅바를 잡고 겨루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 오늘 씨름장에서 보는 자세와 거의 같습니다. 무용총에는 줄지어 춤추는 사람들과 그 앞의 악사가 있습니다. 가야에서는 가실왕의 명으로 만들어진 가야금을 우륵이 열두 곡으로 정리했고, 가야가 무너질 때 그 악기를 안고 신라로 넘어갑니다.

나라는 망했지만 악기는 살아남았고, 지금도 그 이름으로 불립니다.
저잣거리와 뱃길

저잣거리와 뱃길

백제는 바다로 먹고살았습니다.

백제는 서해를 건너 중국 남조와, 남해를 돌아 왜와 통했습니다. 사람과 물건만 오간 것이 아니라 기술과 문자가 함께 건너갔고, 일본에 남은 백제계 유물과 기록이 그 항로의 규모를 보여줍니다. 신라도 왕경에 시장을 열고 이를 감독하는 관청을 두었습니다 — 국가가 시장을 관리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교환이 이미 상당한 규모였다는 뜻입니다.

관청을 두어 감독할 만큼 장이 컸다는 뜻입니다.
무덤이 말해주는 것

무덤이 말해주는 것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무덤을 통해 우리에게 왔습니다.

글로 남은 기록은 왕과 전쟁에 치우쳐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입고 어떤 그릇을 썼는지는 부장품과 벽화가 알려줍니다. 경주에서 나온 신라 토우는 특히 그렇습니다 — 손가락만 한 흙인형들이 아이를 업고, 악기를 켜고, 짐을 지고, 웃고 울고 있습니다. 왕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무덤에 함께 묻으려고 빚은 이 작은 것들이, 남아 있는 어떤 문서보다 사람에 가깝습니다.

왕을 기리려고 만든 것이 아닌 유물일수록, 사람에 더 가깝습니다.

직접 가 볼 곳

이 시대를 다루는 국립박물관과 국가 기관입니다. 대부분 상설전시는 무료입니다.